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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울산∼경주 경계 12㎞ 이어진 왜침 대응 '신라의 만리장성'
언론사 울산신문 조회수 851
작성일 2023-10-06 게재일자 2023-10-06

https://www.ulsanpress.net/news/articleView.html?idxno=513547

 

신라 문무왕이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한반도에 최초 통일국가를 세운 위업을 이뤘으나 남쪽 바다 건너 왜구의 침략은 끓이질 않았다. 죽음을 앞둬서도 왕은 스스로 수증릉의 용이 되기를 자처하며 나라 안위를 걱정할만큼 왜의 도발과 피해는 심각했다. 손자 성덕왕은 고질적인 왜침을 막을 특단의 대비책으로 대형 국책사업 단행을 결심하게 된다. 통일신라 초기에 시행된 이 국책사업이 울산시 울주군 범서읍 두산리에서 경북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삼태봉까지 잇는 관문성(關門城 )의 축성이다.

 

 

일제강점기 때 관문성의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20178월 관문성의 장성 순금산 구간. 문화재청 제공

일제강점기 발굴조사 벌여 지도·측량자료 남겨

 

삼국유사에 72210(성덕왕 21) 인력 39,262명을 동원해 성을 쌓았는데 그 길이가 6,7925(12)이며 공사 감독관은 최고 벼슬아치인 각간(角干) 원진(元眞)이 맡았다고 기록 돼있다.  

 

신라는 궁궐을 에워싼 반월성과 남산신성(南山新城)도 있지만 울산 앞바다에서 올라오는 변방 길목에 전초 기지를 세워 왜적이 서라벌 왕경 땅을 범접하지 못하도록 한것이다. 이 성은 원래 모벌군성(毛伐郡城모벌관문(毛伐關門)으로 불렸다. 후대에 성을 허물고 다시 쌓았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관문성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마을사람들은 만리성이라 부르기도 했다.

 

관문성은 울산시 북구 대안동 동대산 정상부 삼태봉(629m) 인근에 축성한 산성 '신대리성(新垈里城)'과 내륙 경비구역인 '장성(長成)' 등 동·서로 2개 구역으로 나눠 구분 짓고 있다.

 

1872년 조선 고종때 제작된 관문성의 산성인 신흥산성도의 모습. 북쪽 봉수대와 남문과 동문 등 2개의 성문이 그려져 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신라문화연구원 학술조사에 의해 파악된 관문성의 장성과 산성의 지형도. 봉수대의 지형도. 울산 북구 제공

장성은 동쪽 동대산 아래 경주 외동읍 모화리에서 남서쪽으로 울산 북구 천곡동, 중산동과 경주 외동읍 녹동리를 거쳐 서라벌CC 인근인 울주군 범서읍 두산리까지 4개 권역으로 이어진다. 장성 길이는 약 12로 석성이다. 동쪽 끝자락에 있는 신대리성은 마우나오션CC와 인접한 경주시 양남읍 삼태봉에 쌓은 타원형 석성으로 산 정상부를 둥글게 에워싼 둘레가 약 1.2인 테뫼식 산성이다. 산성의 조망권은 사방이 탁 트여 있어 남서쪽 내륙방향으로 관문성 전체뿐만 아니라 경주 남산, 마석산과 울주군 두동면 치술령, 묵장산 그리고 울산 북구 천마산, 순금산이 파노라마 처럼 펼쳐져 울산해안에서 진입하는 왜적의 동태를 잘 살필수 있다. 동쪽 동해 방향으로 울산 방어진에서 경북 포항까지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동대산맥 너머 경주 토함산과 울산의 동대산, 무룡산 일대가 한눈에 들어와 동해안에서 산을 타고 넘어오는 왜적도 감시할수 있다. 신대리성 북쪽에는 장방형 봉수대도 세워 군사 통신망도 갖췄다.

 

1963년 대한민국 사적 제 48호 지정

 

신대리성은 신흥산성(新興山城). 함월산성(含月山城)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었는데 울산에는 기박산성(旗朴山城)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기박산성은 임진왜란때 의병들이 울산 북구 대안동 신흥사의 승병들과 합심해 깃발을 세워 왜군에 맞서 싸운 산성으로 불린 이름이기 때문이다.

 

신라의 방어기지는 대부분 협소한 산성인데 산과 산을 연결하는 관문성을 쌓아 왜침을 체계적으로 대응할수 있는 대규모 방위시설로 그 의미가 크다.

 

일제침탈기 조선총독부는 관문성의 문화재 발굴조사를 벌였는데 1938년 고적 제77호로 지정하면서 유적비도 세우고 지도와 측량 자료도 남겼다. 이때 촬영한 몇 점의 유리건판 사진이 남아 국립중앙박굴관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2015년 울산박물관이 이 흑백사진을 공개하면서 관문성의 실체가 널리 알려졌다. 관문성은 19631월 봉수대와 함께 사적 제48호로 지정됐으나 문화재 구역이 광범위해 오랫동안 사적조사를 하지 못했다.

 

2014·2019년 두차례 학술조사 벌여

 

2014년 문화재 특별점검을 하던 문화재청이 관문성은 보수정비가 필요한 E등급 판정을 내리자 울산시와 경주시는 2014년 신라문화유산연구원에 공동용역을 의뢰했다. 그해 6월 기초 학술조사를 시작해 다음해 20156월까지 13개월간 벌였다. 산성 성벽 10곳에 있던 명문과 수구(水口) 등을 찾았으며 장성의 주요 구간과 체성 그리고 7번 국도 인근 모화와 녹동 2곳의 성문터도 조사했다. 이것이 관문성 사적 지정 이후 52년만에 이뤄진 첫 번째 사적조사였다.

 

2019년 초 울산 북구 천곡동 관문성 구간에서 불법 경작으로 성벽이 훼손 되었다는 제보에 따라 울산연구원 문화재센터가 문화재청과 함께 현장을 찾았는데 자연스레 두번째 관문성 학술조사로 이어졌다.

 

현장에서 성벽 외벽 등 문화재 훼손이 확인되자 같은 해 4월 시굴조사와 6월 정밀발굴조사로 통일신라시대 가장 발달된 축성 기술로 쌓은 관문성의 성축 공법을 비로서 알게 됐다. 비록 한정된 구역이였지만 성의 온전한 체성 구조를 처음 확인했으며 성벽 하단의 조성방식과 내·외벽 축조방법 그리고 적석방법까지 세세히 파악하는 첫 사례가 됐다.

 

성문터·창고 등 발견성축 공법 등 학인

 

두 차례 학술조사를 통해 성 안에는 성문터, 창고터, 병사터가 발견되었다. 석벽은 가로 4050, 세로 2030크기로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해 쌓았는데 남산신성 등 신라의 다른 성보다 훨씬 발달된 성축 기술이 드러났다. 신대리성 남문터에서 동쪽 수구 사이 성벽 바깥 성돌 10곳에 새긴 명문에는 수도인 금경(경주), 서랑군(울산), 절야화군(영천), 퇴화군(흥해) 6곳 주민들의 동원 인력과 축성 영역이 새겨져 있다.

 

관문성이 생기자 서라벌로 들어서는 성의 안과 밖을 가르게 되었고 현재는 경주와 울산을 경계하는 지점이 됐다. 모벌(毛伐)이라 이름은 불화살로 왜구의 머리카락을 태운 유래에서 생겼는데 지금은 모화(毛火)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울산에 자동차·조선 산업기지가 생기면서 성터 인근에 공단이 늘어가고 있다. 모화산단, 외동산단, 석계산단, 문산산단 등 산업단지가 밀집된 지역으로 변모하면서 관문성의 흔적은 옅어지고 있다.

 

그러나 신라의 뛰어난 축성술로 쌓은 만리장성은 고려에서 조선시대까지 관문성이라 불리며 왜적을 막아내고 경주를 지켜온 소중한 문화유산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김동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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