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울산연구원
> 알림마당 > 언론이 본 연구원

언론이 본 연구원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밴드 구글플러스

제목 두루두루 되돌아보는 공업도시 울산 50년
언론사 울산제일일보 조회수 4582
작성일 2012-02-06 게재일자 2012-02-06

http://www.uj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76672
두루두루 되돌아보는 공업도시 울산 50년
newsdaybox_top.gif 2012년 02월 02일 (목) 20:42:10 울산제일일보 btn_sendmail.gifujeil@paran.com newsdaybox_dn.gif


공업도시 울산 4000년이 아닐까?
울산은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이다. 현 울산역 동쪽에서 KCC공장과의 사이에서 발굴된 유적에서는 약 2만 2천년 전쯤에 석기를 제작했던 흔적이 나온다. 인간이 쓰는 모든 도구나 의식주에 필요한 자료를 제작하는 것을 ‘공업’이라 한다면 이 구석기 제작 유적은 ‘울산 최초의 공업 유적지’라고 호들갑을 떨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울산공업 2만 2천년’이라고 떠벌이기에는 뭔가 미흡한 데가 있다. 구석기 시대의 각 마을마다 있었을 법한 소규모 가내공업 수준 정도였을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부터 약 4,000년~5,000년 전쯤에 그려졌을 반구대암각화를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암각화에 나오는 약 300개의 그림 중에는 배(舟나 船)로 보이는 그림이 4개 정도나 나오는데, 한결같이 배 밑바닥이 휘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통나무배는 아닌 것 같다.
문제는 4,000년 전이면 우리나라는 신석기시대 후기쯤 되는데, 톱이 없던 그 시대에 어떻게 하여 나무를 베고 판자를 켜고 그것을 이어 맞춰서 배를 모았을까 하는 점이다. 4척의 배 중 가장 큰 것은 약 20명이 타고 있는데, 그 정도라면 적어도 길이는 10m이상이고 폭은 최소한 2m는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보다 작은 배 3척은 6~10여명이 타고 있지만 이것도 배를 모으는 공정은 비슷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배를 만드는 것은 가내공업일 수가 없다.
이렇게 본다면 울산공업은 50년 전에 시작된 것이 아니고, 적어도 4,000년 전에 이미 시작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거기에다가 삼한시대에 이미 쇠를 제련해 가야와 왜에 수출했다는 기록이 있고, 진한의 염해국이 지금의 염포만(울산만) 일대였다면 삼한시대에 울산은 이미 제염(製鹽)공업이 번성했을 것이다.
울산공업센터가 다른 지역이 아닌 울산에 세워진 것이 어찌 혁명정부나 박정희 대통령만의 결정에 의한 것이었을까? 수천 년 전에 이미 점지된 땅이 아니었을까?

선택 받은 땅, 울산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장군(당시 육군 소장)을 중심으로 한 혁명군은 4·19 이후 들어선 장면 정부의 무능과 혼란을 제어하고 자칫 공산화할 위기의 국체를 보존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켰고, 그 혁명공약에 4,000년의 가난에서 벗어나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내세웠다.
그러고 보니 농경국가로써는 도저히 가난을 벗어날 수 없겠기에 ‘공업입국(工業立國)’의 기치를 들게 됐고, 대규모 공업단지를 형성해야 할 필요성 또한 절실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당시 육군대장)은 비행기를 타고 남한 전역을 샅샅이 살펴서 최종적으로 울산을 선택했다고 한다.
공업센터가 갖출 입지 조건은 첫째 원료를 수입하여 싣고 오고 제품을 실어 수출할 수 있는 대형 항만이 들어설 수 있어야 하고, 둘째 수백만 평 내지 수천만 평의 비교적 평탄한 땅이 있어야 하고, 셋째 충분한 공업용수가 조달 되어야 하며, 넷째 육운 해운 항공의 교통이 편리한 곳이어야 하고, 다섯째는 북한 장거리포의 포격 거리를 벗어날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이런 조건을 다 갖춘 곳이 울산이었기에 혁명정부는 울산에 민족중흥(民族中興)의 꿈을 묻었던 것이고, 울산은 그로부터 50년 만에 수출 1천억 달러라는 위업을 이룸으로써 산업수도로 세계적 도시로 당당히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다.

1962년 당시의 울산시민 정신
61학번인 나는 당시에 경북대 사범대를 다니느라 대구에 있었기 때문에 1962년 1월 27일의 ‘울산공업센터 선포’나 2월 3일의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을 울산에서 맞지는 못했다. 그러나 방학 때 내려와 보니 울산은 온통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그 하나는 조용한 시골이던 울산고을이 하루아침에 부자도시로 변한다는 꿈에 부풀어 있는 측면에서였고, 다른 하나는 삶의 터전인 집과 논밭과 심지어는 조상의 산소까지 국가에 다 바치고 이제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불안의 측면 때문이었다. 특히 지금의 남구 지역의 대현면(大峴面) 일대가 그 흥분의 중심지였다.
그 때에도 토지나 집이나 분묘에 대한 국가적 보상은 있었지만 요즘에 비하면 미미했는데, 그래도 울산토박이들은 국가가 하는 일이라서 순순히 믿고 따라줬다. 지금처럼 국가사업을 벌이는 곳마다 데모를 벌이고 반대를 했더라면 아마 울산공업센터는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 후로 방학 때마다 고향에 돌아와 보면 울산은 날로 달로 달라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의 SK 자리인 고사동은 일제 때부터 있었던 정유공장 시설이며 마을이 다 뜯겨 나가고는 새로운 정유공장(유공)이 어머어마하게 들어서고 있었고, 거기 있던 내 모교인 대현초등학교도 선암동으로 옮겨졌으며 부곡동과 하개동의 일부가 석유화학단지로 바뀌면서 불도저라는 중장비가 수십 대씩 산이고 논밭이고 마을이고 마구 깎아내는 굉음이 밤낮으로 왕왕거렸다. 부곡동에서는 나무가 화석이 된 규화목(硅化木)이 엄청나게 나와 보석이나 되는 줄 알고 집집마다 가져다 두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하개동이 없어지면서 하개동과 지금의 오대 오천 마을 사이에 있던 유명한 ‘마채 염전’도 영영 사라졌고 개운포 바다의 북쪽 수십만 평이 공단부지로 메워졌으며 농사와 소작 염전을 병행하던 내 아버님도 일터를 잃어 망연자실 하셨다.
외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울산으로 울산으로 몰려 들었고 농사일 밖에 모르던 토박이들은 터를 닦아 방 하나에 부엌 하나씩 붙은 집을 줄줄이 지어 집세를 받아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이들 간에는 얼마간의 갈등도 있었지만 다들 찢어진 가난에 찌들어 본 사람들이라 그런대로 서로 도우며 보살펴 하나씩 둘씩 점차 ‘울산사람’으로 어우러지고 있었다. 이런 일들이 내가 수시로 고향에 내려와서 볼 수 있었던 1960년대 울산의 변화였다.

1970년대 이후의 울산 발전
1970년에 나는 대학 5년, 군대 3년, 대학원 2년, 도합 10년간의 타향살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그 전 해에 설립된 학성고등학교(당시 사립)의 교사로 열심히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럴즈음 유공(현 SK)에서는 원유를 정유하고 납사를 분해해 울산화학공단의 각종 공장에 원료를 제공하고, 그 공장들은 열심히 제품을 생산해 국내 충당과 해외 수출을 했으며, 동구의 미포만에는 ‘현대조선소(현 현대중공업)’가 지어져 30만t 급의 유조선을 만들고 있었다. 울산만의 여러 부두가 완성되었고, 그 외에도 미포만과 전하만에는 배를 만드는 도크가 엄청나게 크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미포만의 하얀 마사모래는 수석을 즐기던 나로서는 최고의 수반 모래로 치고 있었지만,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어서 아쉽기도 했다.
현대중공업은 당시에, 한편으로 공장을 지으면서 한편으로는 배를 모았는데, 1,2호선을 진수할 때에는 “저 큰 철선이 과연 바다에 뜰지 드러누울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기대와 불안의 소리가 시민의 입에서 입으로 쉬쉬하며 전해지기도 했지만, 막상 진수와 시운전항해에 성공하자 전시민은 비로소 “우리도 하면 할 수 있구나”하는 감격과 자신감을 얻게 됐고, 그 기쁨으로 술집마다 술이 동나기도 하였다.
염포에서 양정동에 걸쳐서는 현대자동차가 점점 확장 발전했는데, 처음에는 염포동 치전부락 앞에서 시작했고 당시의 양정동 쪽은 아직도 갈대가 우거지고 그 속에서 장어가 잡혀 장어요리집이 번성하기도 했다. 지금의 번영로 남쪽 CP 여천천 남쪽에는 60년대에 지어진 ‘울산호텔’이 울산 공단을 찾아오는 경제인들과 외국 바이어들의 유일한 숙소가 됐는데, 지금 태화루를 복원하려는 자리에는 또 다른 작은 호텔이 지어져 울산 졸부들이나 유지들이 드나들며 사업을 하기도 했다.
회사마다 사택을 지어 직원과 근로자들의 숙소로 제공했지만 태부족이어서 전세나 달세는 달마다 해마다 올라 유입인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울산공단이 다 차버리자 다시 온산공단을 만들어 비철금속 공단으로 키웠고,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가 점점 번성하자 북구와 경주시 외동읍과 양남면 일대까지 협력업체의 부품공장이 뻗어나갔다.
80년대에 이르러서는 삼산들이 도시화되어 사방 십리의 울산평야가 사라졌고, 90년대에는 명촌에서 송정에 이르는 관상들도 사라지고 그 자리에 도시가 달려왔는데, 그 때마다 농사를 짓던 옛 토박이들은 “저러면 무얼 먹고 사노?”하면서 걱정을 하기도 했다.

울산광역시 승격
내가 알기로는 울산시를 광역시로 만들자는 계획은 그 당시 울산대학교 총장으로 와 있던 이상주 교수와 몇몇 보직교수들의 머리에서 시작됐고 그 소문이 울산상공인들과 공무원들, 시의원, 도의원들에게 퍼지면서 점점 구체화 되었던 것이다. 교수들과 상공인들과 공무원들 시·도의원들과 전 시민들이 그야말로 하나가 되어 고생고생 끝에 1997년 울산은 ‘울산광역시’로 승격했다. 공해와 땀으로 범벅이 되었던 이 소도시가 비로소 긍지를 가진 대도시로 재탄생되었던 것이다.
정치가 출신의 초대 심완구 시장은 다른 모든 업적 위에 울산이라는 대도시의 하드웨어적 기반을 멋지게 세운 공적을 잊을 수 없고, 행정가 출신인 지금의 박맹우 시장은 공업도시의 발전이라는 기본 업적 위에 시민의 삶의 질을 높여 환경과 문화와 산업이 조화된 도시로 키웠다는 공적을 잊을 수 없다.
이제 울산은 세계의 도시로 나가야 한다. 산업은 물론이고 문화와 예술도 수출하는 도시로 키워야 한다. 도덕과 질서에 순응하고 문화적 가치가 115만 시민의 마음 속에서 솟아나는 고상한 도시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향하는 도시는 서울이나 부산이 아니라야 할 것이다.
끝으로 내가 늘 생각해 왔던 말 하나를 던지고 글을 맺고 싶다.
울산공업도시 50년, 연 수출 1천억 달러를 성취한 이 행복한 도시를 있게(存在) 해주신 몇몇 은인들의 동상을 시민의 이름으로 세워드리자는 것이다.
우리는 남들이 군사독재자라고 비난하더라도 울산에 공업센터를 세우도록 결정하고 전력투구로 이 공단들을 키워주신 박정희 대통령의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 되고,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 미포조선 등 주력 기업을 이곳 울산에다 지어주신 정주영 회장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SK를 울산에 세워 석유화학공업의 바탕을 깔았던 최종현 회장과, 4,000년 가난을 벗기 위해서는 ‘공업입국’으로 나가야 하고 공업단지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진언을 박 대통령에게 올리고 울산에 한국비료회사를 세워 공단을 형성시켰던 이병철 회장을 잊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각종 공장들을 울산으로 유치하는 데에 음으로 양으로 몰래 애썼던 이후락 실장의 숨겨진 공로에도 감사해야 할 것이다.
울산공업도시 50년을 어찌 이 몇 줄 글로 다 나타낼 수 있으랴마는, 우리는 지금까지 울산이 한국을 먹여 살린 견인차였고 앞으로도 통일 조국을 먹여 살리는 도시로 키우겠다는 자부심으로 그 못다 한 말을 채웠으면 좋겠다.

울산발전연구원 공업센터 50주년 기획특집 전문 요약


(44720) 울산광역시 남구 삼산중로 6 TEL.052-283-7700 FAX.052-289-8668
COPYRIGHT(C) Ulsan Research Institut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