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씨름은 일제에 항거한 ‘무언의 발산’ | ||||||||||||
오늘 울산학센터-시체육회 세미나 울산씨름의 태동·전성기·성격 고찰 | ||||||||||||
| ||||||||||||
울산발전연구원 울산학센터와 울산광역시체육회는 20일 오후 2시부터 울산시청 의사당 3층 대회의실에서 ‘울산의 전통적 놀이문화 씨름’을 주제로 울산학연구 세미나를 갖는다. 정상태 울산문화연구소장은 이날 발표할 자료를 통해 울산지역 씨름의 태동과 전성기, 그 성격 등에 대해 전반적인 고찰을 시도했다. 정 소장의 자료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때 울산에서 전국 규모의 씨름대회를 처음 개최한 것은 1924년 9월14일부터 16일까지다. 당시 시대일보는 “남선각희대회(南鮮脚戱大會)는 14일 오전 11시부터 울산군 하상면 동천 사장에서 개최하였는데, 관광객이 인산인해를 이룬 대성황이었다”고 보도했다.남선은 한반도 남쪽을, 각희는 씨름을 말한다. 병영 동천 씨름대회가 성황을 이룰 무렵인 1928년 추석을 계기로 태화강 중도(中島)에서도 전국 규모의 씨름대회를 개최했다. 울산읍에서는 그 동안 학성공원에서 개최해 오던 씨름대회를 중도로 옮겨 전국 대회 규모인 제1회 남조선 각희대회를 열었는데, 3일간 진행된 대회는 하루 더 연장할 만큼 성황을 이뤘다고 동아일보는 보도했다. 중도는 이 때부터 1960년대 모래가 소멸될 때까지 울산 씨름장으로 각광을 받았다. 특히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는 울산 씨름의 황금기였는데, 전국의 유명 선수들이 울산씨름 우승을 최대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일제가 본격적으로 민속경기를 탄압, 1935년 이후부터는 씨름대회에 관한 보도가 사라진다. 이같은 현상은 일제의 울산지방 청년운동의 견제와 민족말살정책 등 때문으로 분석된다고 정 소장은 밝혔다. 울산 씨름은 이후 1945년 ‘각희대회’라는 명칭 대신 ‘전국추석씨름대회’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 울산씨름은 6.25 때도 지속될 정도로 우리나라 씨름대회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정 소장은 “울산사람들에게 씨름은 단순한 오락적 기능 뿐만 아니라 큰 긍지였다”면서 “특히 울산 씨름이 일찌기 신학성 신화가 깃든 학성공원에서 의식적인 행사로 치러졌음을 볼 때 시민 정서의 근간을 차지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정 소장은 또 “과거의 열정적인 씨름을 상기하면서 태화강에 씨름장을 복원해 울산씨름의 명성을 되찾는 계기가 만들어졌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이재명기자 jmlee@ksilbo.co.kr |
> 알림마당
> 언론이 본 연구원
언론이 본 연구원
제목 | 울산 씨름은 일제에 항거한 ‘무언의 발산’ | ||
언론사 | 경상일보 | 조회수 | 4498 |
작성일 | 2011-12-20 | 게재일자 | 2011-12-20 |
http://www.ks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354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