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울산연구원
> 알림마당 > 언론이 본 연구원

언론이 본 연구원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밴드 구글플러스

제목 “태화강 씨름장 복원, 명성 되찾자”
언론사 울산매일 조회수 4350
작성일 2011-12-21 게재일자 2011-12-21

http://iusm.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2120
“태화강 씨름장 복원, 명성 되찾자”
울산학연구 세미나서 주장
20년〜60년대 씨름 대회 고찰
이만기 인제대 교수 기조강연
[12면]의 기사보기 JPG.gif PDF.gif paperView2.gif
img_scrap.gif facebook.gif twitter.gif me2day.gif yozm.gif
newsdaybox_top.gif 2011년 12월 21일 (수) 노화정 기자 btn_sendmail.gifps2002nhg@iusm.co.kr newsdaybox_dn.gif
▲ 울산발전연구원과 울산시체육회가 마련한 울산의 전통적 놀이문화 씨름 세미나가 20일 시의사당 대회의실에서 열려 이만기 인제대학교 교수가 ‘전통문화로서의 씨름’을 주제로 기조강연을 하고 있다. 우성만 기자 smwoo@iusm.co.kr

울산의 대표적 전통 놀이문화인 ‘씨름’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울산학연구 세미나가 ‘울산의 전통적 놀이문화 씨름’을 주제로 20일 오후 2시 울산시 의사당 3층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울산발전연구원과 울산시체육회가 마련한 이날 세미나에서는 이만기 인제대 교수의 기조강연과 김석원 울산씨름협회장, 김재곤 울산대 씨름부 감독, 정도영 울산광역시체육회 사무차장, 최성훈 울산대 교수, 허령 울산광역시의원 등이 나서 토론을 벌였다.

정상태 울산문화연구소장은 발표 자료를 통해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울산의 씨름대회 현황 및 그 성격 등에 대해 전반적인 고찰을 시도했다.

그는 “울산 사람들에게 씨름은 단순한 오락적 기능뿐 아니라 큰 긍지였다”며 “울산 씨름이 일찍이 신학성 신화가 깃든 학성공원에서 의식적인 행사로 치러졌음을 볼 때 시민 정서의 근간을 차지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울산 씨름은 울산 청년들의 항일운동과 더불어 일제에 항거하는 무언의 발산이었다는 주장도 펼쳤다.

정 소장의 자료에 따르면 ‘학성지(鶴城誌)’라는 문헌에 울산씨름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당시 울산 최대의 민속놀이 마두희(馬頭戱)에서 씨름으로 승부를 겨뤘다고 기록돼 있다.

일제강점기 때 울산에서 전국 규모의 씨름대회를 처음 개최한 것은 1924년 시대일보 병영분국이 주최한 ‘제1회 남선 각희 대회’(9월 14일~16일)다. 당시 시대일보는 “남선각희대회(南鮮脚戱大會)는 14일 오전 11시부터 울산군 하상면 동천 사장에서 개최하였는데, 관광객이 인산인해를 이룬 대성황이었다”고 보도했다.

병영 동천 씨름대회가 성황을 이룰 무렵인 1928년 추석을 계기로 태화강 중도(中島)에서도 전국 규모의 씨름대회를 개최했다. 중도는 이 때부터 1960년대 모래가 소멸될 때까지 울산 씨름장으로 각광 받았다.
특히 당시 전국의 유명 선수들이 울산씨름 우승을 최대의 목표로 삼았을 만큼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는 울산 씨름의 황금기였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 일제가 본격적으로 민속경기를 탄압, 1935년 이후부터는 씨름대회에 관한 보도가 사라진다. 이 같은 현상은 일제의 울산지방 청년운동의 견제와 민족말살정책 등 때문으로 분석된다고 정 소장은 밝혔다.

울산 씨름은 이후 1945년 ‘각희대회’라는 명칭 대신 ‘전국추석씨름대회’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 울산씨름은 6.25 때도 지속될 정도로 우리나라 씨름대회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정 소장은 “과거의 열정적인 씨름을 상기하면서 태화강에 씨름장을 복원해 울산씨름의 명성을 되찾는 계기가 만들어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44720) 울산광역시 남구 삼산중로 6 TEL.052-283-7700 FAX.052-289-8668
COPYRIGHT(C) Ulsan Research Institut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