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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도시로 획일화된 성장을 해온 울산의 새로운 발전을 위해서는 도시개발에 있어 다양성을 갖춰야 하고 지역문제 전문가 육성에 힘써야 한다. 더불어 지역 정치인들이 화합과 상생의 자세로 지역발전을 위한 논의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사진은 석유화학공단 야경. 울산매일 포토뱅크 iusm@iusm.co.kr |
울산매일 창간 20주년을 기념해서 도시계획과 개발 중심으로 지난 20년을 되돌아보았다. 지금부터 20년 전인 1991년을 전후한 시기는 당시 기초시였던 울산이 크게 성장한 시기로, 인구와 도시규모가 모두 크게 늘어났다. 1987년에 처음 70만 명을 넘어서 실제로 울산인구는 71만5,241명에 달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3년 후인 1990년에는 80만 명을 넘어섰고, 다시 3년이 지난 1993년에는 91만 9,912명이 되었다. 6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울산시의 인구는 20만 4,671명이나 증가했던 것이다. 이것은 93년 인구의 22.2%에 해당되고, 87년 인구의 28.6%를 차지하는 수치다. 70만 도시의 인구가 불과 6년 사이에 1/3가까이 늘어났던 것이다. 이렇게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면 필연적으로 해결해야 될 문제도 뒤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당시의 울산은 또 하나의 도시개발 압력에 직면하고 있었다. 바로 <공해주민 이주 사업>이다. 공단개발 초창기에는 공장을 돌리는 <검은 연기>가 발전의 상징이던 시절이 있었다. 여기에다 당시로서는 필연적으로 선진국의 공해 산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정도 있었기 때문에 울산에서도 일찍이 1970년대 초반부터 공해문제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1980년대 후반이 되면서 산업도로 동편의 공업단지, 즉 <공단방책선> 안에 위치한 울산 및 온산 국가산업단지 주민의 이주사업이 본격화 되었고, 그에 따라 병영, 남외, 반구, 태화, 삼호, 옥동, 삼산, 달동지역에서 도시개발 사업이 봇물을 이루게 되었다.
■급격한 성장이 광역시 승격의 원동력
말하자면 울산은 1980년대 후반부터 급격한 인구성장과 공해주민 이주사업이라는 더블펀치가 도시개발 사업을 두들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병영성>이 발굴되어 국가사적이 되기도 했고, 구강서원이 있던 반구동 <서원산>은 아파트 개발로 깎여나가 버렸으며, 학성공원의 <왜성>도 아랫도리는 모두 도로와 택지로 잘려 나갔다. 지금은 다행히 <태화강 대공원>이 된 태화들도 이즈음에는 주거지역으로 개발되어 사라질 뻔 했었다. 한편으로는 번영교, 학성교, 신삼호교 같은 태화강에 걸린 대규모 교량도 이때 건설되었고, 남산로, 강변도로, 북부순환도로, 남부순환도로 같은 간선 가로망도 본격적으로 갖추어 졌다.
그리고, 이런 급격한 성장은 경상남도 한 켠의 기초시에 불과했던 울산을 드디어 광역시로 승격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승격 후의 빛나는 성과는 일일이 다 거론할 필요가 없겠지만 필자는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늘 갈증과 허기를 느낀다. 그 뿐 아니라 항상 울산의 장래가 불안하게 느껴진다. 필자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와 함께 필자 나름의 해결방안을 제안해 보면서 이번 원고를 마무리 하고자 한다.
최근에 읽은 여러 글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인터뷰 기사가 하나 있다. 그것은 지난 4월 국내 유력 일간지에 실린 하버드 대학의 천재 도시경제학자 에드워드 글리저 교수의 기사다. 그는 미국의 대표적인 자동차 도시 디트로이트가 실패한 이유에 대해 “수십만 명의 비숙련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단일 산업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으며, “성장의 필수 조건인 다양성과 경쟁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제조업 도시들은 교육기관에 절대 투자하는 법이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의 지적은 기업이 세운 울산대학교가 있는 울산시에는 해당되지 않아 보이면서도 과거 일제강점기에 똑 같은 5년제 갑종 농업학교로 출발해서 4년제 국립종합대학으로까지 성장한 <순천대학교>와 지금도 고등학교에 머물러 있는 <울산공업고등학교>를 보면 수긍이 되기도 한다.
■정부 필요 따라 공장 집중, 선택의 여지 없어
글리저 교수의 지적에 공감하는 필자로서는 대기업의 본사도 아닌 제조공장 중심으로 형성 발전해 온 울산을 돌아보면서 장래를 생각할 때는 두려운 마음마저 든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비단 필자뿐일까. 울산은 정말 급하게 성장해 왔고, 산업 생산 능력만을 기준으로 하면 이미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산업생산’에 국한되는 얘기일 뿐 결코 도시 자체의 진정한 경쟁력은 아니라는 사실을 솔직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앞의 글리저 교수 말을 다시 빌어보자. 그는, 도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세상 변화에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발명(reinvention)해야”하며, “도시의 재발명은 교육받은 인력, 작은 기업들, 그리고 서로 다른 산업 간 창조적인 상호작용에 의해 가능해진다”고 했다. 그런데 울산은 글리저 교수가 든 세 가지 조건 모두 열악하다. 현재까지의 울산은 정부가 정부의 필요에 의해 대기업 공장을 집중시키고, 그렇게 입지한 기업들이 선전하고 있기에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이런 여건이 바뀌게 되면 우리가 선택할 답이 별로 없다는 것이 우려스럽다. 물론 이런 우려를 지울 수 있는 해결책도 많이 있을 수 있고, 우려 자체가 기우로 끝날 수 도 있지만 과거 지구상에서 성장, 발전하다가 사라져간 많은 도시들을 들여다보면 필자의 우려가 기우일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다.
■산업구조·토지이용 등 획일화 끝내야 할 때
먼저 울산의 경우도 글리저 교수의 지적처럼 광역시로 새로운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재발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 이유는 대기업 생산시설 중심의 도시로는 장기적인 도시발전에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필자의 지론인 <식민성>도 같은 맥락에서의 주장인데, 울산은 <대일본제국>의 병참기지나 <대한민국정부>의 공업센터로 키워졌을 뿐 울산의 독자적 발전 방안은 언제나 개발논리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이제는 우리 울산이 스스로의 한계를 분명히 하고 화려한 외양이 아닌 내실 있는 발전논리를 주문해야 될 시점에 와 있다. 울산의 재도약을 위해서는 <다양성>이 관건이다. 즉 산업구조, 토지이용, 도시 인프라, 인재 유치 모두 획일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두 번째는 지역 전문가를 키우고, 전문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울산은 1986년에 첫 도시기본계획이 수립되고, 이후 5년 마다 꾸준히 새로운 도시계획의 틀이 만들어져 왔지만, 진정한 울산의 비전이 담긴 적이 있었는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왜냐하면 이런 계획이 항상 ‘기술용역’ 수준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울산 소재 대학에 <도시>관련 학과가 없고, 그 결과 관련 전문가가 태부족이며, 전문가가 부족하다보니 관련 연구 성과 역시 아주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2001년에 설립된 울산발전연구원도 이상하리만큼 <도시계획>분야를 키우는 데는 인색했다. 울산광역시의 진정한 장기비전 마련은 지역에 대한 공통 이해를 바탕으로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지역문제> 전문가가 많을 때 비로소 가능해 질 것이다.
세 번째는 지역 정치인의 역할을 주문하고 싶다. 지역의 디테일한 정서와 인간관계를 한 단계 높은 수준에서 도시발전에 접목시키기 위해서는 지역발전을 위한 지역 정치인들의 화합과 상생하는 자세가 필수적이다. 지역발전을 위한 논의만큼은 독선과 아집, 반목과 편견을 버리고 화합과 포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정책에 대한 건전한 비판과 대안 제시에도 마치 인격 모독을 당한 것처럼 발끈하는 정치인이 많아서야 지역발전을 위한 고민과 비판을 누가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싶다. 지역사회는 대단히 디테일하다. 지지정당은 물론이고 출신 중·고교에 군대시절 부대에다 심지어는 출신 마을과 집안은 물론 식성에 술버릇까지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지역사회다. 이런 독특한 지역정서에 왕따와 편 가르기가 덧붙여지면 지역발전을 위한 공동 노력은 요원해 진다. 비판을 비난으로 보지 않는, 입에 쓴 약을 삼킬 줄 아는 성숙한 지역정치인이 많아질 때 비로소 20년 후의 진정한 울산발전이 약속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