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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현해탄 건넌 청년들, ‘일제 저항’위해 문화주체로 서다
언론사 울산매일 조회수 8686
작성일 2011-06-27 게재일자 2011-06-27

http://www.iusm.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7825
현해탄 건넌 청년들, ‘일제 저항’위해 문화주체로 서다
울산의 뿌리를 찾아서-울산발전연구원 공모과제 소개 ②일제강점기 울산출신 일본유학생 문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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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daybox_top.gif 2011년 06월 26일 (일) 정리=변의현 기자 btn_sendmail.gifbluewater@iusm.co.kr newsdaybox_dn.gif
   
 

◆울산 출신의 유학 생활

일제강점기 울산은 울산군, 언양면, 동면을 통합하면서 경남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군이 됐다. 뿐만 아니라 울산은 일본과 가까운 지리적 위치로 인해 1929년 조선 최초의 국제공항 건설, 1935년 동해남부선 개통 등 교통요지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울산은 부산항을 이을 항으로 급부상한 장생포와 방어진 등 큰 항구를 기반으로 한 조선, 어업 산업 발달하면서 상당한 자본이 모여들었다. 자연스럽게 일자리를 찾아 울산으로 오는 사람이 많아졌다. 울산으로 자본과 사람이 모여들면서 교육에 대한 열망도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하지만 이 부분은 쉽게 충족되지 못했다. 1926년 이전에는 보통학교만이 있었기 때문에 보통학교 졸업생들이 중등학교를 다니기 위해서는 외지로 유학(遊學)을 떠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90%는 학업을 포기하고 매년 보통학교 졸업생의 10%만이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울산을 떠났다.  
보통학교 졸업생들이 유학을 떠난 지역은 경성, 대구, 부산 등 대도시였다. 경성에서 중등학교를 다닌 인물은 최현배·박관수·이관술·김천해였고, 강정택·신고송·정인섭·김병희는 대구에서, 송석하는 부산에서 중등학교를 다녔다.

다른 지역으로 유학을 한 후에는 일본 유학을 떠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제국대학, 대학, 전문학교, 사범학교 등에 따라 임금, 승진에서 많은 격차가 있었다. 입신양명을 가장 빨리 할 수 있는 방법은 제국대학 입학이었다. 대학에 따라 수준과 등급이 정해져 있어 대학 졸업장이 취업과 출세를 보장하는 증명서가 되었다. 제국대학 출신으로는  최현배와 박관수, 강정택, 김병희 등이 있다. 최현배는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했고, 박관수와 강정택은 동경제국대학을 중퇴·졸업했다. 그리고 김병희는 규슈제국대학을 졸업했다. 

일제강점기 일본 유학생의 증감(增減)에서 주의 깊게 살펴볼 시기는 1919년과 1923년이다. 3·1운동과 관동대지진은 유학생들의 문화운동을 촉발시켰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919년 3·1운동을 겪으면서 민족의 실력을 향상시키자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유학생이 두 배 가까이 급증했으나 관동대지진을 겪으면서 1922년 3,222명이었던 유학생이 1923년에는 992명으로 급감했는데 이는 조선인에 대한 반한감정 및 일본 경기 불황 등이 원인이었다.


◆일본유학생들의 문화운동

이처럼 쉽지 않은 유학생활을 이어나가면서도 민족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문화운동을 전개했다는 점도 일제강점기 유학생들의 특징이다. 유학생들이 문화운동을 전개한 이유는 무엇일까. 유학생들에게 유학이 개인의 입신양명의 수단만은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유학생들은 조국과 고향을 위해 기여해야 한다는 사회적인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생각은 유학생 뿐만 아니라 당대 사회가 유학생을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했다. 울산에서 유학생들에게 학비와 숙식비를 모금해서 송달하는 등 각종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유학생들이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오면 환영회를 열어 주고, 유학생과 울산 사람이 함께 여행을 떠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신문에 공지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사는 유학생과의 여행이 울산인에게 일정한 영향을 미친다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에 기획될 수 있었다. 일련의 과정을 거친 유학생들은 스스로도 문화운동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울산 사람들은 조선 사회의 유학생들이 문화적 실력양성에 공헌하기를 요구, 지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방학을 맞거나 졸업한 후 꾸준히 다양한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학생들은 활동 거점을 확보하는 차원으로 신문지국 운영 및 기자, 출신 지역 청년단체, 울산유학생학우회 등을 결성해 문화운동을 전개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언양청년회와 언양소년회에 참여한 신학업, 신고송 등이었다. 이들은 야학, 토론회, 강연회, 연예회, 야유회 및 각종 운동경기 등 오락성을 가진 문예, 오락, 체육 활동을 열었다. 

유학생들의 문화운동은 경성보다 지방에서 더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조선총독부가 문화 정치를 표방했지만 경성의 지식인을 지속적으로 통제한 반면 지방은 통제하기가 쉽지 않았다. 유학생들은 이를 간파하고 조선총독부의 통제가 상대적으로 덜한 지방에서 문화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노력했다. 문화운동은 일제에 저항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조선총독부와 극단적으로 대립하지 않고 학술, 예술, 문학, 체육, 언론, 사회 운동 등을 통해 민족의 주체성을 회복하자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지방은 경성보다 문화가 낙후된 곳이었기 때문에 문화적인 발전이 필요하다는 당위성도 확보할 수 있었다. 문화행사를 접할 기회가 적었던 지방 사람들에게 유학생들의 활동은 의미 있는 경험을 주는 사건이었다. 울산은 일본과 가깝기 때문에 일본으로 떠난 경상도 출신 유학생이 많았던 점도 울산에서 다양한 문화운동이 전개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친목회에서 출발한 유학생 모임은 민족 개조나 자긍심 고취를 목적으로 하면서 전문화 되어나간다. 자신들이 일본에서 배운 지식을 조선에 전달함으로써 조선인의 계몽하고자 했다. 방법은 ‘회보’를 발간해 조선에 보내는 방식이었다. 유학생들의 문화운동은 시간이 지나면서 좀더 직접적이고 전문화되어 나간다. 
유학생들은 민족개조를 위한 첫 번째 방법으로 계몽운동을 선택했다. 대중을 계몽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강연회·강습회’가 필요했다. 특히 강연회는 대다수 조선인이 문맹자였던 상황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계몽 활동이었다. 강연회의 내용은 교육과 경제 발달을 위한 방법이 주를 이루었다. 

야학 뿐만 아니라 병영청년회에서는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재학 중인 이관술을 강사로 초빙해 수학과 영어를 무료로 가르쳤다. 청년회에서는 농촌 계몽에만 치중돼 학술적 문화가 부족한 울산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활동이라고 목적을 밝히기도 했다.

최현배 역시 한글 강의와 민족 개조를 위한 강연회에 나섰다. 그는 교육을 통해 민족을 개조하면 조선이 독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선 민족의 쇠퇴는 민족성으로부터 기인했기 때문에 민족성 변화만이 현실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교육과 더불어 강조한 것이 건강한 육체를 만들 것도 강조했다. 그는 체육활동이 민족성을 개조할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당대 일반적인 분위기였다. 체육구락부나 학교에서 각종 운동 경기 대회를 개최함으로써 민족 개조와 국가에 기여할 국민 만들기에 나서기도 했다. 

교육과 체육만큼 경제발전 역시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대되었다. 조선 경제발전을 위한 ‘협동운동사’ 결성도 이러한 목적이었다. ‘협동운동사’의 주축은 와세다대학 재학생, 경상도 출신 등이었으며, 경상도는 협동조합운동사 계열의 협동조합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 곳이다. ‘협동운동사’는 1928년 7월 18일부터 2개월 일정으로 울산을 비롯한 36개 지역을 순회하면서 문화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활동들은 민족 개조를 위한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문제는 민족을 계몽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조선인의 자긍심이 저하되어있다는 점이었다. 민족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한 방법으로 역사를 강조하고자 하는 노력이 시작된 이유이다.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지리·역사를 전공한 이관술은 교사생활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조선인으로서 자부심을 일깨우려고 노력했다.

정인섭의 활동도 이와 유사하다. 영문학을 전공한 그는 극예술연구회, 해외문학파 등 다양한 분야의 학술 연구단체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면서도 조선만의 이야기를 찾아 책으로 발간하였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송석하의 활동이 있다. 그는 자료 수집의 중요성을 강조한 민속학에 전념했다. 최초의 현장조사자이자 광범위한 민속자료의 조사·발굴·보존에 주력했다. 뿐만 아니라 신문과 잡지를 통해 민속의 중요성을 대중에게 알리는 활동도 진행했다. 강정택도 <울산 달리의 사회위생학적 조사>를 통해 울산의 문화를 기록으로 남기는 데 기여했다.

대중을 만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인 소인극을 통한 문화운동도 전개되었다. 소인극은 비전문가들이 하는 아마추어 연극으로 집단의 화합과 단결, 계몽과 선전, 정서함양과 인성수련 등을 목적으로 하는 연극을 말한다. 소인극은 청년회·학우회·야학회·종교 단체, 신문사 등에서 후원하거나 주최했다. 내용은 지역의 현실적인 문제나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폭로, 비판하는 것이었다. 공연 수익금은 해당 기관의 유지와 회관 건축, 기근 구제, 이재민 구제 등을 위한 사용되었다. 

민족 개조를 위한 계몽 운동은 단체를 결성하고 회보를 발간하는 데서 시작해 지역을 찾아다니는 강연회와 강습회, 연설회 등으로 전개하는 양상을 보인다. 또한 민족의 자긍심 고취를 위한 예술운동은 자료 수집 복원 중심의 민속 운동, 대중 지향의 소인극 운동, 건강한 국민을 만들기 위한 체육 운동 등으로 나타난다.


*본 내용은 울산발전연구원 부설 울산학연구센터 공모과제로 선정된 울산대 김선주 박사의 연구를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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