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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변 전통마을, 내륙으로 이어지는 문화경로 출발지
언론사 울산매일 조회수 10390
작성일 2011-06-20 게재일자 2011-06-20

http://www.iusm.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7273
강변 전통마을, 내륙으로 이어지는 문화경로 출발지
울산의 뿌리를 찾아서-울산발전연구원 공모과제 소개 ①회야강변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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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daybox_top.gif 2011년 06월 19일 (일) 정리=변의현 기자 btn_sendmail.gifbluewater@iusm.co.kr newsdaybox_dn.gif
   
▲ 1765년에 근재공 이의창이 세운 집으로 울산에 몇 남아 있지 않은 양반종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웅촌면 석천리 돌내마을 ‘근재공고택’

  지역학 연구는 말 그대로 지역의 뿌리를 찾는 작업이다. 이를 통해 지역주민에게 자긍심과 애향심을 고취하고 궁극적으로 지역의 발전을 견인하는 역할을 한다. 

  울산에서는 2006년 3월 개소한 울산발전연구원(원장 하동원) 부설 울산학연구센터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센터는 그동안 시민들의 '삶의 질' 개선을 목적으로 다양한 역사적·사회적·자연적 요인들의 실태를 파악해 왔다.

  또한, 관련 자료의 수집, 유관기관의 협력체계 구축 등을 통해 울산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각종 연구를 진행해오고 있다.

  이에 본지는 시민들이 보다 더 울산을 이해하고 애향심을 높일 수 있도록 울산학연구센터의 2010년 연구논총의 과제로 연구된 ‘회야강변의 마을’, ‘일제강점기 울산 출신 일본 유학생의 문화운동’, ‘울산지역 전통음악의 자료현황과 연구과제’, ‘울산시지역 바닷가 마을의 동제 현황과 특징’ 등 총 4가지 과제를 매주 한 차례씩 4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물길 40㎞·유역면적 200㎢에 달하는 회야강, 전통마을 끼고 굽이쳐
 ·상서마을   일제강점기 초기 중수된 해주오씨 집안 가옥이 대표적
 ·양천마을   구한말·근대 초기 주택 남아있어…예스럽고 소박한 멋
 ·돌내마을   배산임수 지형…문화재자료 근재공고택·석계서원 보존
 ·진하마을   서생진성(鎭城)·회야강 포구 연결로로 자리잡기 시작
 

  요즘 들어 사람들은 강을 삶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바가 적어 그 의존도가 상당히 약화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강은 사람들에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컸고 절대적이었다. 따라서 강변에 위치한 전통마을은 강을 끼고 문화를 정착·이동시킨 주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강변의 마을은 내륙으로 이어지는 문화 경로의 출발지라는 점에서도 그 중요성이 있다.

  회야강(回夜江)은 경남 양산시 웅상읍(현재 웅상출장소) 평산리의 장흥저수지 일원에서 시작되어 남동(南東)으로 흘러 서생면과 온산읍을 끼고 진하(鎭下) 앞바다로 흘러든다. 그리고 회야강은 이름 그대로 고을[夜:마을, 동네]과 마을을 굽이쳐 흐르는 강을 뜻하듯이 곳곳에 마을을 끼고 있다.

  회야강의 유로(流路)는 약 40km 이상이고, 유역면적은 220.8㎢에 달한다. 그리고 강 상류의 웅상(雄上, 현재 양산시)과 웅촌(雄村) 일원에서 큰 평야를 이루었고, 온양읍에도 넓은 서포들(野)을 형성하고 있다.

  『울산읍지(1934)』에는 회야강에 대하여 '울산부의 남쪽 40리(里) 거리에 한 줄기는 남천(南川)이고, 또 한 줄기는 불광산에서 내려와 온양면 발리촌(鉢里村)앞에서 합류하여 동남의 바다로 흘러든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회야강은 남천과 불광산에서 흘러나온 남창천을 합친 것 전체를 뜻하며, 회야강의 두 갈래 중 남천이 먼저 언급된 것을 볼 때, 회야강의 본류이자 발원천은 남천임을 알 수 있다.

  울산 최초의 읍지인『학성지(1749)』에 등장하는 회야강변에 여러 마을들 중 현장
답사결과 전통적으로 구성되어 왔던 마을의 구조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는 마을은 다음(표 참조)과 같다.

  이 마을들 중에서 주택과 마을의 구조가 전통성을 상당부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고 전통마을을 보존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온양읍 동상리의 상서마을, 청량면 동천리의 양천마을, 웅촌면 석천리 돌내마을과 서생포왜성과 포구를 이어주는 길이 주 통로로 이어진 독특한 구조의 서생면 진하리의 진하마을을 살펴보자.


   
▲ 상서마을 해주 오씨 집안 오세익씨의 가옥.


◆온양읍 동상리 상서(上西)마을

  동상리의 가장 위에 위치한 상서마을은 그 앞의 너른 들을 바탕으로 마을의 세(勢)가 형성되었다. 현재 상서마을에는 해주오씨, 평산신씨, 영월엄씨, 김해김씨 등이 살고 있으며, 이 중 해주오씨 문중이 가장 견실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은 선상지의 구릉 말단부에 위치한 마을로 남창천과 회야강을 이어주는 길목에 있기 때문에 도로에 지선(支線)이 연결된 형식이다. 그리고 시대별로 마을을 이룬 여러 성씨의 문중이 단위개체를 이루었기 때문에 지선을 기준으로 수평적으로 집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 

  마을 중 주목되는 건축은 해주오씨 집안의 주택들인데, 마을 동쪽 골짜기 일원에 배치되어 있다. 그 중 오세익씨의 가옥은 튼ㅁ자형으로 균형 잡힌 배치를 보여준다. 해주오씨의 집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초기에 중수된 것으로 관리가 잘되어 전통마을의 분위기를 한껏 자아낸다. 이와 같은 마을의 모습은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지형도에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현재의 모습은 적어도 1900년대 이전에 구축된 것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마을 내 주요 시설로는 오호영(吳鎬永)의 추모지소(追慕之所)로 그 후손들이 1890년을 전후하여 초창, 1990년대에 번와 및 목부재를 교체하는 등의 중수, 1970년을 전후하여 보수한 옥강정(玉岡亭)이 있다.


◆청량면 동천리 양천(良川)마을

  양천마을은 화장산(華莊山)에서 동쪽으로 뻗은 산기슭에 위치하여 있다. 예종 원년(1469)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 울산군 남쪽의 양천리라 한 기록이 있는 등 1500년대 이전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유서 깊은 마을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동천리에 속하게 되었으며, 1400년 경 경주이씨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였고, 현재도 주(主)를 이루고 있다. 이후에 달성서씨, 밀양박씨, 남평문씨 등이 입향하여 약 40여 호를 이루고 있다.

  양천마을은 회야댐의 조성과 더불어 원래의 물길이 바뀌어 버렸다. 회야강물은 양천마을의 북서쪽에 위치하였던 중리(中里)로부터 마을의 동쪽으로 흘러들었는데, 지금은 그 동쪽을 막아 댐을 만들었고, 배수는 마을의 서쪽 구릉을 깎아 만들었기 때문에 수량(水量)은 마을 서쪽 정골 쪽이 많아서 마치 주(主) 수계(水系)처럼 느껴진다.

  양천마을은 비교적 급한 경사지에서 회야강을 내려다보듯 동쪽으로 앉아 있다. 마을길도 중리마을로 향하는 방향과 중리의 서쪽에 위치하였던 신리(新里)로 바로 통하는 두갈래 길로 나뉘었다. 그리고 마을의 확장은 방형(方形)에 가까운 지형특성 때문에 사방으로 고르게 확장되었다. 때문에 마을길도 격자에 가까운 모습이다.

  현재 마을 내에는 구한말 또는 근대 초기에 조성된 주택이 몇 남아 있어 거경재(居敬齋)와 더불어 고졸한 맛을 자아낸다. 거경제는 국포 이익만이 문인들과 뜻을 모아 건립한 서당이자 이익만의 독서지소로 양호정사(良湖精舍)라고도 한다.


   
▲ 웅촌면 석천리 돌내마을 ‘석계서원’
◆웅촌면 석천리 돌내[石川]마을

  ‘돌내’란 ‘물길이 돌아가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돈다’에서 온 ‘돌(石)’을 썼으니 뜻을 빌린 이두식 한자표기이다. 마찬가지로 ‘회야강’의 ‘회야(回野)’도 ‘돈다’는 의미와 ‘마을’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와 함께, 돌내란 돌이 많은 내[川]란 뜻도 가지고 있다. 즉 돌내를 한자로 표기하면 석계(石溪)가 된다. 마을의 지형은 마치 소쿠리처럼 서-북-동으로 산이 감싸고 앞으로는 회야강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다. 마을 뒤에 솟아있는 노방산이 주산이고, 회야강 건너편에 솟아있는 베락(벼랑)이 안산이며 풍수적으로 빼어난 길지로 꼽힌다.

  돌내마을은 아주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국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마을 뒤에 드넓은 농토를 두어 배면이 비교적 산만한 느낌을 준다.   이는 아마도 미세하지만 돌내마을이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지형을 이루고 있고, 그것이 꽃받등이 주변에서 극대화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마을에는 반촌(班村)임을 보여주는 시설이 여럿 있는데,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3호로 지정된 ‘울산학성이씨 근재공고택’과 문화재자료 17호인 ‘석계서원’이 있다. 근재공고택은 1765년에 근재공 이의창이 세운 집으로 울산에 몇 남아 있지 않은 양반종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마을길은 회야강 상류지역과 중하류지역을 잇는 도로가 마을 앞을 지나가고, 그 길은 마을 안쪽과 석계서원을 잇는 길과 서로 교차한다. 즉 석계서원 일곽은 마을의 앞쪽 회야강의 경승(景勝)을 중심으로 작은 마을을 이루고, 근재공 고택은 마을 안쪽에서 경작지를 관장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돌내마을은 단위 지역 안에서 거주 및 생산과 휴식을 모두 얻어내는 마을로 보기 드문 사례에 속한다.


   
 

◆서생면 진하리 진하(鎭下)마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서생포왜성을 아군의 서생포동첨절제사(西生浦同僉節制使)가 머무는 진성(鎭城)으로 사용하였고, 이후 진성의 남문 아래로부터 회야강의 어귀로 이어지는 진(鎭)의 아래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진하로 불리게 되었다.

  진하마을은 누가 입향하여 개척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이나 구전은 전무한 상태로 초기의 연혁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서생포왜성의 남쪽 및 남동쪽 말단부가 배를 정박하였던 곳임을 감안할 때, 정유재란이 끝난 뒤에는 왜성(倭城)을 진성으로 사용하였고, 성내(城內)와 그 남동쪽 아래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1872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울산서생진지도’에는 산세를 이용하여 축조된 성곽과 내부의 관청 건물, 그리고 주변 지역의 마을 모습이 세밀하게 잘 묘사되어 있다. 서생진성의 남문을 빠져나온 길은 회야강 하구의 포구를 향하여 길게 휘어지며 뻗어나가는 모습이며, 현재에도 그 길은 뚜렷이 남아 있다. 즉, 진하마을은 서생진성과 회야강 하구의 포구를 연결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이규헌·이종수기념비나 만석정이 이 주(主) 통로변에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
‘울산서생진지도’를 보면, 서생진의 아래에 40­여 호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수군의 배를 관리하는 주사(舟師)가 회야강의 하구에 묘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명선도는 마을의 왼쪽으로 비껴나 있음을 볼 때, 현재의 마을구조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명선도에서 서생포왜성 쪽으로 촬영된 사진을 보더라도 마을은 회야강 하구 쪽으로 뻗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본 내용은 울산발전연구원 부설 울산학연구센터 공모과제로 선정된 이창업 박사(울산과학대)의 연구를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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