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일찍 뜨는 조용한 바닷가, 천혜의 산물과 자원, 그리고 빼어난 풍광을 가진 울산,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은 이러한 울산에 살기 시작했다.
근대 이전의 산업은 노동집약적이었는데, 공업은 특히 그러했다. 일찍이 울산을 대표하였던 철광업과 염업은 울산에 외지인들을 불러들였다. 외지인들이 정착하여 울산사람이 되었고 ‘울산다움’을 만들어갔다. 이처럼 울산은 외지인을 맞이할 때 거부감이 없었고, ‘울산’이라는 이름처럼 서로 어울려 살았다. 울산의 역동성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62년 2월 3일 울산공업센터 지정으로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되면서 울산에 공단이 건설되고, 더욱 많은 외지인들이 단기간에 울산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어디에 살았을까?
1960년대초까지만 하더라도 울산은 지방의 소읍에 불과하였다. 도심이라고 해 봐야 기껏 지금의 중구 일원이 고작이었던 울산에 대규모 공단이 설립된 것은 대사건이었다.
사람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의․식․주 3가지가 충족되어야 하며, 그 중 집은 의와 식의 장소가 된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회사는 근로자들의 집을 마련하여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그래서 작업능률이 높아지기를 바랬다.
이렇게 마련된 집이 바로 사택이다.
1960년대에 공단의 토목공사가 진행되어 회사가 들어설 때마다 울산의 도심주변에 사택이 조성되었다. 그렇게 울산에는 사택이라는 생소한 주택의 유형이 만들어졌고 그만큼 울산의 주택이 다양해지기 시작하였다.
집은 사람을 이해하는데 종합적인 판단의 기준이 되곤 한다. 프랑스의 유명한 건축가 르 꼬르뷔지에는 건축을 ‘인간의 삶을 담는 그릇’이라고 정의했는데, 건축의 기본이 곧 집이라는 의미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집의 이름을 자신의 호와 동일시 하곤 하였다. 바로 이런한 점에서 사택의 중요성을 찾을 수 있다.
근로자들이 살았고, 살고 있는 사택을 이해하는 것이 곧 그들을 알아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2012년이면, 1962년 울산공업센터 지정 후 반백년을 맞이하게 된다. 울산공업 50주년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던 울산사람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울산공업을 바라보는 여러 시각이 있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살았던 집인 사택을 조명함으로써 그 단편이나마 이해해 보고자 한다.
■ 목차
프롤로그 3
1. 역사로 바라본 울산산업(공업)의 알고리즘 5
2. 산업의 발달은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61
3. 울산산업과 근로자들 69
4. 사택이란 무엇인가? 73
5. 근대 이전 울산에 사택이 있었을까? 87
6. 울산의 사택, 어디에 있나? 119
7. 사택은 도시를 일구는 마을이다 241
8. 사택은 진화한다 273
9. 사택과 울산사람들 283
10. 울산사람들 319
에필로그 323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2-12-05 15:03:30 연구보고서에서 이동 됨]